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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마테르 전쟁 Matir Krieg Matir Wa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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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83년 2월 22일 ~ 1984년 7월 15일 | |||||||||
장소 | |||||||||
북랜드 지방 | |||||||||
원인 | |||||||||
MAL기 사건, 민케 대학살에 대한 마베라의 보복 | |||||||||
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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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상페드로 4세 | |||||||||
전력 | |||||||||
-명 | -명 | ||||||||
결과 | |||||||||
반한랜드 연합군의 승리 | |||||||||
영향 | |||||||||
웨스타시아의 멸망 및 마베라로 편입 | |||||||||
피해규모 | |||||||||
1. 개요 [편집]
웨스타시아와 마베라 왕국 사이에서 1983년 2월 22일부터 이듬해 7월 15일까지 일어난 전쟁. 단 1년 7개월간 일어난 전쟁이었지만, 이 전쟁으로 웨스타시아가 멸망하고, 양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2. 배경 [편집]
웨스타시아와 마베라, 이 두 나라는 예로부터 오랜 앙숙이었다.
2.1. 마테르는 누구인가? [편집]
2.2. 마베라: 민케 교단에 대해 [편집]
2.3. 웨스타시아: 이쪽도 상황이 좋지는 않다 [편집]
한편, 이 모든 짓들을 저지른 웨스타시아도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1981년은 정부의 잘못된 부동산정책이 불러온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면서 나라의 경제가 시궁창으로 떨어진지 3년이 채 안지난 시점이었고 이미 7대기업 3개가 도산하고 거리엔 실업자와 부랑자가 넘쳐날 정도로 상황은 크게 악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불만은 대게 정부에게 향했다. 가뜩이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데다 정부수반 대부분이 외국인이라 정통성이 전무하던 정부였는데, 버블 붕괴는 어찌어찌 경제 호황으로 버티고 있던 군사정권의 막대한 지지율 하락을 초래했다. 전국에서 쏟아지는 반란의 낌세들은 군사경찰을 통해 속속히 군부에 보고되었고, 대게는 거사를 개시하기도 전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지만 앨빈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선 이를 이대로 계속 방치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1978년 이후로 잠잠해졌던 유고랜드 독립운동이 다시금 일어설 기미를 보이는 것도 불안의 요소 중 하나였다.
앨빈 대통령의 선택은 외부의 적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81년 9월 11일 제49차 전당대회에서 한 연설로 단숨에 자신들의 지지율을 회복시키고, 국민들을 군대로 결집시켰다. 그들은 그 연설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되, 그 책임을 IMF, 세계은행 등의 국제금융기관들과 웨스타시아가 무너지고 떨군 자본들을 줍줍한 서방세계한테 돌리면서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 동시에 당시 IMF 총재의 출신국이자 1차 랜드전쟁 시절을 제외하면 예로부터 오랜 숙적이었던 마베라에 전 국민의 적대감을 집중시키면서 전쟁 분위기를 조성했다. 마베라 지하에 묻힌 희토류들을 채굴하면 전자산업계의 반도체 보급난이 해결될 것이라는 약간의 귀띰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선전내용의 90%는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였지만, 이미 2차대전 시절부터 양국간의 국민감정은 좋았던 적이 없었기에 재계의 전문가들이 반박을 준비했을때 이미 대중들은 선동되버린지 오래였고, 머지않아 그 전문가들도 군사경찰에 의해 대부분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마베라는 당연히도 적반하장이라는 식으로 대꾸했다. 외무성에서도 여러차례 항의성명을 내고 민케 학살에 대한 배상금과 사죄를 다시금 요구했지만, 웨스타시아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양국간의 관계가 슬슬 개차반이 되던 찰나, 양국간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터졌다.
이러한 불만은 대게 정부에게 향했다. 가뜩이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데다 정부수반 대부분이 외국인이라 정통성이 전무하던 정부였는데, 버블 붕괴는 어찌어찌 경제 호황으로 버티고 있던 군사정권의 막대한 지지율 하락을 초래했다. 전국에서 쏟아지는 반란의 낌세들은 군사경찰을 통해 속속히 군부에 보고되었고, 대게는 거사를 개시하기도 전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지만 앨빈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선 이를 이대로 계속 방치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1978년 이후로 잠잠해졌던 유고랜드 독립운동이 다시금 일어설 기미를 보이는 것도 불안의 요소 중 하나였다.
앨빈 대통령의 선택은 외부의 적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81년 9월 11일 제49차 전당대회에서 한 연설로 단숨에 자신들의 지지율을 회복시키고, 국민들을 군대로 결집시켰다. 그들은 그 연설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되, 그 책임을 IMF, 세계은행 등의 국제금융기관들과 웨스타시아가 무너지고 떨군 자본들을 줍줍한 서방세계한테 돌리면서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 동시에 당시 IMF 총재의 출신국이자 1차 랜드전쟁 시절을 제외하면 예로부터 오랜 숙적이었던 마베라에 전 국민의 적대감을 집중시키면서 전쟁 분위기를 조성했다. 마베라 지하에 묻힌 희토류들을 채굴하면 전자산업계의 반도체 보급난이 해결될 것이라는 약간의 귀띰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선전내용의 90%는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였지만, 이미 2차대전 시절부터 양국간의 국민감정은 좋았던 적이 없었기에 재계의 전문가들이 반박을 준비했을때 이미 대중들은 선동되버린지 오래였고, 머지않아 그 전문가들도 군사경찰에 의해 대부분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마베라는 당연히도 적반하장이라는 식으로 대꾸했다. 외무성에서도 여러차례 항의성명을 내고 민케 학살에 대한 배상금과 사죄를 다시금 요구했지만, 웨스타시아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렇게 양국간의 관계가 슬슬 개차반이 되던 찰나, 양국간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터졌다.
2.4. MAL기 격추사건 [편집]
1982년 9월 1일, 카이로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동사랜드 베젤 공항을 거쳐 마베라 트리넬 국제공항으로 이동하던 367편(기종 747-230B, 기체 등록번호 HL7442)이 웨스타시아 서부 상공에서 웨스타시아 공군에 격추당해 추락한 사건으로 마베라 국적기가 당한 사고 중 최악의 사고 규모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사고 당시에는 세계 5위, 오늘날에도 세계 12위 규모의 엄청난 사고다.
2.4.1. 격추 [편집]
1982년 9월 1일 0시 5분 무렵 367편은 웨스타시아 북동쪽 상공에 진입하였는데 이때 웨스타시아 공군은 367편의 진입을 눈치챘고 마베라 공군의 군용기라고 판단하였다. 오전 1시 30분에 367편은 웨스터시아의 영공에 진입하였지만 대응하기엔 367편이 칼펜슈타인 상공에 체공할 시간이 많지 않아 배치되었던 편대는 요격을 시도하지 않고 귀환했고 367편은 오전 2시 28분에 웨스타시아 영공을 통과하고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오전 2시 36분에 마베라항공 367편이 다시 웨스타시아 섬 상공에 접근하였고 이때 웨스타시아군은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오전 3시 5분에 367편은 뒤따라오던 마베라 항공 015편과 교신했고 서로 바람 방향이 다른 것을 알았다. 015편은 정상적으로 웨스타시아 영공을 피해서 날고 있었으므로 그랬던 것이지만 367편 조종사는 비행계획서를 체크하고 오차 범위 안쪽이라고 판단하여 자신이 항로를 이탈한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곧이어 오전 3시 8분에 겐나디 위르겐 괴링(Gennadi Wirgen Guering, 1944–2015)이 탑승한 웨스타시아 공군 소속 유진 토네이도가 367편을 확인했다. 새벽 시간이라 아주 어두웠기 때문에 기종 식별은 불가능했고 항법등과 충돌방지등이 점멸하고 있는 것을 보고했다. 그러나 이는 면피성 답변으로, 후일 괴링의 인터뷰에 따르면 꼬리의 민항기 마크 등을 식별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괴링의 토네이도가 367편을 추격하면서 경고사격을 했지만 야간이었던 데다 괴링이 탑승한 토네이도의 탄띠에 예광탄이 없는 상태로 사격해 367편에서는 자신들이 위협사격을 당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오전 3시 5분에 367편은 뒤따라오던 마베라 항공 015편과 교신했고 서로 바람 방향이 다른 것을 알았다. 015편은 정상적으로 웨스타시아 영공을 피해서 날고 있었으므로 그랬던 것이지만 367편 조종사는 비행계획서를 체크하고 오차 범위 안쪽이라고 판단하여 자신이 항로를 이탈한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곧이어 오전 3시 8분에 겐나디 위르겐 괴링(Gennadi Wirgen Guering, 1944–2015)이 탑승한 웨스타시아 공군 소속 유진 토네이도가 367편을 확인했다. 새벽 시간이라 아주 어두웠기 때문에 기종 식별은 불가능했고 항법등과 충돌방지등이 점멸하고 있는 것을 보고했다. 그러나 이는 면피성 답변으로, 후일 괴링의 인터뷰에 따르면 꼬리의 민항기 마크 등을 식별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괴링의 토네이도가 367편을 추격하면서 경고사격을 했지만 야간이었던 데다 괴링이 탑승한 토네이도의 탄띠에 예광탄이 없는 상태로 사격해 367편에서는 자신들이 위협사격을 당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MAL367: Mabera Air 367 climb and maintain FL350 leaving FL330 at this time. 동사랜드관제소: East Saland Control Roger. | 367편: FL330에서 FL350으로 상승한 뒤 유지하겠습니다. 마베라항공 367편. 동사랜드관제소: 동사랜드 컨트롤, 알겠습니다. |
위 무전을 367편과 동사랜드관제소가 나눴을 때 괴링의 토네이도는 367편의 바로 뒤에 있었다. 그런데 이때 동사랜드와 무전을 마친 367편이 고도를 35,000ft(10668m)로 올리기 시작했다. 기수를 들면서 속도가 조금 떨어졌기 때문에 괴링의 토네이도는 367편을 앞질러가게 되었다. 이렇게 경고사격 이후에 고도를 올린 것은 경고사격을 알아차리고 반응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토네이도의 조종사 괴링은 367편이 자신을 인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격적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고도를 높이며 속도를 줄이는 것이 공격적 행동이 되는 이유는 첫 번째로 대다수의 전투기의 무장은 전면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뒤에 있는 비행기가 항상 유리하다. 그리고 서로 속도가 동일한 상황에서 앞에 있는 기체가 기수를 들어올리는 등의 방식으로 속도를 빠르게 줄이면 뒤에 있는 비행기가 앞 기체를 오버슛하여 앞지르게 되는데 이러면 역으로 뒤를 잡히게 되는 것이므로 공군 조종사 입장에서는 자신을 따돌리려는 리버설, 즉 공수를 바꾸는 기동인 것이란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두 번째로 전투기나 요격기는 그렇게 느려진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날기 어렵다. 전투기는 민항기에 비해 익면적도 작고 중, 고속 기동성을 중시하거나 아예 속도에 몰빵하는 설계라 민항기보다 실속속도가 훨씬 빠르다. 즉, 요격기의 조종사에게 이 행동은 전투기의 실속을 유도하는 지능적인 행동으로 비쳤고 따라서 해당 항공기는 민항기 마크는 위장용으로 그려진 것이고 전투기의 특성을 꿰고 있는 군 관계자가 탑승한 모종의 군용기라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런 우연이 없었다고 해도 367편이 괴링의 토네이도를 무시(실제로는 어두운 밤에 예광탄도 없이 사격하여 알아차리는 것이 불가능하했다.)하고 도주를 계속하는 이상 격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서부지방 웨스타시아 방공망의 대응이 그다지 신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괴링의 토네이도가 367편과 조우한 것은 이미 367편이 웨스타시아군 기지 주변을 지나서 공해로 빠져나가려는 시점이었다. 격추시키지 않으면 눈 뜨고 그대로 놓치는 수밖에 없는 데다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당시 보잉 707을 개조한 루이나 공군의 전자정찰기인 RC-135가 웨스타시아 영공을 침범했다 말았다 하면서 약올리는 비행 방식[1]에 웨스타시아 공군의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잔뜩 벼르고 있던 것도 한 몫했다.
367편의 속도가 줄어들면서 고도를 상승하며 오버슛을 하게 되자 명백하게 자신을 따돌리려고 한다고 생각한 괴링은 다시 367편의 주위를 빙 돌아 367편의 8km 뒤편으로 날아가 오전 3시 25분 무렵에 파이어스트릭 공대공 미사일 2발을 발사했다.

한발의 미사일은 주익의 엔진에 명중하였고 다른 한발은 기체 후방부에서 근접폭발했다. 367편은 미사일에 피격된 여파로 기체 후부에 구멍이 뚫리면서 급격한 감압이 일어났고 이 충격으로 최소 1개 이상의 유압장치가 완전히 파괴되었다.[2] 피격 직후 367편은 잠시 38,000ft(11582m)까지 급상승하였고 이후 약 11분간 추락하며 활공하다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이때 10여 분이나 남아 있었는데도 367편이 비상상황임을 알리고 MAYDAY를 하지 않았는지는 미스터리다.[3] 조종사들은 피격 직후 상승하던 불안정한 기체를 제어하기 위해 랜딩 기어를 내리는 시도도 했지만[4] 자동조종은 물론 정상적인 수동조종도 어려움을 느끼고 비상강하를 시작한다.
367편은 꼬리부분이 손상[5]되어 유압을 상실한 채로 주변을 강하하며 비행하다가 추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ICAO 최종조사 보고서에서는 승객들이 추락 직전까지 살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으며 괴링은 서부 해안가 근처에서 367편이 나선선회를 하면서 추락하는 것을 확인하고 기지로 복귀했다. 367편이 최후의 순간 동안 급강하한 데다 바다는 땅에 비해 충격을 반사하므로 수면을 강타한 직후 생존자가 있었을 확률은 없다. 추락 직후로 추정되는 시점에 빌베른의 오징어잡이 어선[6] 크리스쳔 로스가 폭발을 목격했다고 한다.
한편 367편과 무전이 되지 않자 015편과 동사랜드 관제소는 다급하게 367편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심지어 동사랜드 관제소는 웨스타시아의 민간 항공관제소에도 연락을 했지만 367편이 마지막으로 보고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이후 웨스트시아가 격추 사실을 시인하였고 부랴부랴 빌베른 해군과 루이나 해군, 마베라 해군, 그리고 민간 트롤어선까지 동원해 공해상에서 구조와 수색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으며 심지어 웨스타시아 해군과 해안경비대가 루,빌,마 구조대가 웨스타시아 영해로 진입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유력 추락 지점인 서부 해안 근해는 수색하지도 못했다.
이후 사고 현장과 인접한 빌베른 근해에서 일부 유류품과 13명분의 시체 조각을 찾았다. 한편 367편이 추락한 직후 웨스타시아는 추락지점 근해를 수색했는데 원래는 RC-135의 잔해와 블랙박스, 컴퓨터 그리고 영공침범의 증거로 마베라군의 시신을 인양하러 간 것이지만 자신들이 격추한 것이 RC-135가 아니고 그냥 민간인이 탄 민간 항공사의 민항기였다는 것을 뒤늦게 안 뒤 경악했다. 이때 367편의 파편과 블랙박스, 유류품이 수거되었다. 원래 웨스타시아는 자기들이 민항기를 격추했다는 사실을 은폐할 생각이었으나 루이나의 정보 공개로 무산되었고 루이나와 마베라의 압박 때문에 1982년 9월 26일 웨스타시아는 유류품 213점을 전달했다. 그러나 블랙박스와 잔해들은 마테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웨스타시아는 367편 블랙박스의 존재를 부인했다.
3. 경과 [편집]
3.1. 웨식트(Wexit): 비동맹노선으로 [편집]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루이나와 미합중제국을 비롯한 제1세계 국가들(특히 폴란드와 서독)은 40년전의 악몽을 다시금 떠올리기 시작했다. 군국주의 정권, 선전선동을 통한 지지율 강화, 민족에 대한 적대심 유발 및 혐오정치, 거기에 영토확장 야욕까지...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모양세 아니었던가? 해협은 다시금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웨스타시아는 경제력 이슈로 결코 그리 강한나라가 아니었지만 만약 마베라가 전쟁에서 진다면 중립을 무시하는 군국주의 특성상 시스타니아, 체르드, 델라웨어 등의 랜드해협 북부 중립국들도 도미노처럼 차례차례 무너지게 되고, 이렇게 되면 북마베라해의 재해권[7]과 영토, 각종 희토류와 천연자원들을 한랜드가 깡으로 손에 쥐어 서방세계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루이나는 마베라를 택했다. 1983년 2월 10일, 벨포르에서 열린 제7차 NLTO 정상회의에서 웨스타시아의 퇴출에 대한 안건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궁지에 몰린 I.S. 아이에스 외무부 장관은 자존심이라도 지키려 회담장을 박차고 나옴과 동시에, NLTO 자진탈퇴를 선언했다. 마베라는 유엔 총회에도 웨스타시아에 대한 제제안을 발의했지만, 은근슬쩍 자본주의 진영의 내분을 유도한 제2세계 국가들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렇게 그해 가을부터 웨스타시아는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앨빈 대통령은 83년 12월 28일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유진그룹의 민수 사업분야 대부분을 삭감 및 매각, 그룹의 거의 모든 역량을 중공업과 전자에 집중했다. 다른 기업들도 모두 전쟁쥰비에 동원돼 이듬해 1월까지 400척이 넘는 유보트가 생산되어 해안요새에 배치되고, 국경지대 산맥 아래에는 갓 생산된 자동소총을 든 군부대들이 집결했다. 마베라도 이에 지지않아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전환하고 신형 땅크 개발 및 도입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해가 밝고 2달이 지난 1984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웨스타시아는 마베라에 최후통첩문을 보냈다. 자국의 경제 사ㅋ보타쥬에 대한 배상금 39조 레티를 배상하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흘 뒤였던 2월 18일, 마베라 측에서도 최후통첩문을 날렸다. MAL기 격추사건과 민케 학살에 대한 배상금 27억 레티를 배상하지 않으면 즉각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양국은 물론 서로의 최후통첩에 무시로 대응했다. 동월 20일에는 주마베라 웨스타시아 대사관이, 21일에는 주웨스타시아 마베라 대사관이 본국으로 철수를 마쳤다. 그렇게 하루 뒤인 2월 22일 새벽, 양국의 명절 콩콩절에 맞춰 선전포고문 발송 30분후 웨스타시아 육군이 마베라 국경을 넘어가면서 짧고 굵은 남북의 전란이 시작되고 만다.
결국 루이나는 마베라를 택했다. 1983년 2월 10일, 벨포르에서 열린 제7차 NLTO 정상회의에서 웨스타시아의 퇴출에 대한 안건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궁지에 몰린 I.S. 아이에스 외무부 장관은 자존심이라도 지키려 회담장을 박차고 나옴과 동시에, NLTO 자진탈퇴를 선언했다. 마베라는 유엔 총회에도 웨스타시아에 대한 제제안을 발의했지만, 은근슬쩍 자본주의 진영의 내분을 유도한 제2세계 국가들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렇게 그해 가을부터 웨스타시아는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앨빈 대통령은 83년 12월 28일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유진그룹의 민수 사업분야 대부분을 삭감 및 매각, 그룹의 거의 모든 역량을 중공업과 전자에 집중했다. 다른 기업들도 모두 전쟁쥰비에 동원돼 이듬해 1월까지 400척이 넘는 유보트가 생산되어 해안요새에 배치되고, 국경지대 산맥 아래에는 갓 생산된 자동소총을 든 군부대들이 집결했다. 마베라도 이에 지지않아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전환하고 신형 땅크 개발 및 도입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해가 밝고 2달이 지난 1984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웨스타시아는 마베라에 최후통첩문을 보냈다. 자국의 경제 사ㅋ보타쥬에 대한 배상금 39조 레티를 배상하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흘 뒤였던 2월 18일, 마베라 측에서도 최후통첩문을 날렸다. MAL기 격추사건과 민케 학살에 대한 배상금 27억 레티를 배상하지 않으면 즉각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양국은 물론 서로의 최후통첩에 무시로 대응했다. 동월 20일에는 주마베라 웨스타시아 대사관이, 21일에는 주웨스타시아 마베라 대사관이 본국으로 철수를 마쳤다. 그렇게 하루 뒤인 2월 22일 새벽, 양국의 명절 콩콩절에 맞춰 선전포고문 발송 30분후 웨스타시아 육군이 마베라 국경을 넘어가면서 짧고 굵은 남북의 전란이 시작되고 만다.
3.2. 침공 후 일주일, 40년전의 악몽 [편집]
전쟁의 첫 포성은 웨스타시아가 가져갔다. 1984년 2월 22일 오전 4시, 최후통첩 기간이 만료되자마자 웨스타시아 전군에 '할아버지가 살아나셨다'라는 역사적인 개전암호가 타전되었다. 4시 3분경, 럭샤슨호르스트급 2번함 시후니제나우의 11.1인치급 주포가 에스타뉴산 너머를 향해 전쟁의 첫 번째 고폭탄을 쐈다. 이윽고 김용하 장군 휘하의 13개 포병연대와 그 유명한 구스타프 III급 열차포 6문이 포격전에 동참하고 보름달을 까맣게 가린 공군의 전폭기들이 에스타뉴산을 넘어왔다. 마베라 국왕 샹페드로 4세가 개전 사실을 보고받았을때는 이미 6,900발의 포격이 산맥 너머에 내리꽂힌 뒤였다. 한편 에스타뉴산을 넘어온 웨스타시아 공군은 할파야 공중전에서 마베라 공군을 궤멸시킨뒤 제공권을 장악, 마베라 서부의 모든 땅에 폭격을 가했다. '쿤타치 작전'이라 명명된 이 작전은 웨스타시아의 7일 전쟁 계획에 기반을 둔 사전 초토화 작전으로, 지상군이 병력을 전개하기 전에 전 마베라 영토의 거의 모든 기반시설, 인프라, 군사시설을 모조리 파괴시켜 3일 트리넬 진격을 가능케 하는것이 요지였다.
개전 3일째, 포격과 폭격이 잠잠해짐과 동시에 반 폐허가 된 트리넬 국제공항에 웨스타시아의 13개 공수여단이 투하됐다(부르군트 작전). 웨스타시아 공수군은 전차바퀴보다 큰 모든것을 싹다 죽였다. 샹페드로 4세와 왕가는 당초 수도를 지킬려 했지만, 왕궁의 코앞까지 공수부대가 진격해오자 어쩔 수 업이 칼펜시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마베라 군부의 모든 이목이 수도에 몰려있는 사이, 25일(개전 4일째) 3시경 한랜드 제6,9,7군단이 님부스시에서 마베라군 제44사단을 괴멸시켜버린 것을 시작으로 웨스타시아 육군이 마베라 남부지방을 파죽지세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쿤타치 작전의 후속으로 기획된 '바로바로싸 작전'의 요지는 일단 서부전선 중간에 위치한 369고지를 점령해 마베라 수비군을 동서로 분단, 양군의 전략적 연계를 끊은 뒤 둘로 분단된 마베라군을 베타와 감마 집단군이 해안과 산맥으로 밀어 포위섬멸하고 그러는 동안 알파 집단군은 최대한 신속한 기갑웨이브로 트리넬까지 진격해 공수군과 합류, 트리넬 시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마치 40년전의 그 나라를 보는듯한 경의로운 진격속도로 웨스타시아군은 공격 이틀만에 369고지를 점령했고, 마베라의 전력은 그들의 계획대로 동서로 갈라져 버렸다.
이제 남은것은 쌍두가 된 참새의 대가리를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동쪽의 마베라 제1,9,7군은 바르디야 전투에서 김용하 장군 휘하의 감마 집단군에게 몬타나 산맥에 포위되어 전멸해버렸고, 서부의 가다메스 수비군은 남쪽에서 몰려온 베타 집단군과 해안가를 선점한 한랜드 2군단에 의해 아게다비아 강변 방면으로 포위되어 포로 한명 없이 몰살되었다. 11사단장 시디 바라니 소장은 3시간 가량의 가잘라 대교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했지만 결국 한랜드군의 아게다비아 강 도하를 막을 순 없었다. 참새의 쌍두가 잘리면서, 이제 서부전선에 알파 집단군을 막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트리넬을 향했다.
개전 5일째, 연방방위부 국장 직권으로 화학무기 사용이 허가됐고, 그날 오후 9시경 루프트바페는 맛보기삼아 베이다에 스타인먼 화학이 갓 만든 사린, 소만, VX, 겨자가스 등의 대규모 화학무기 공습을 가했다.[8] 그곳은 마베라군의 남부주 사령부, 일명 맘무트 요새가 있던 도시였다. 이 화학탄 공습에서 도시를 수호하던 제21연대는 6시간만에 전 병력 7만명중 2,300명을 빼고 전멸했고, 몬타나주 사령부는 모두 포로가 되어 마베라 동부 야전군에 거대한 지휘 공백이 생겼다.
맘무트 요새로 총사령부를 이전한 웨스타시아 군부는 베이다의 뽕맛을 잊지 못하고 2월 26일(개전 6일째)부터 4달에 가까운 시간동안 서부전선 전역에 화학탄 폭격을 가했다. 지속된 가스폭격으로 인해 빈사상태가 된 마베라군을 한랜드 전차부대가 1차로 빠르게 쓸고 간 뒤, 독가스가 어느정도 가라앉으면 후속 보병부대가 2차로 남은 잔당들을 청소하는 전투양상이 수도에 도달할 때까지 쭈욱 반복됐다. 그것은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기동전, 일명 '전격전'이 반백년 남짓한 세월을 넘어 가장 끔찍한 형태로 부활한 것이었다.
결국 2월의 마지막날이자 개전 7일째 되던 1983년 2월 29일. 남쪽에서 달려온 알파 집단군이 트리넬에 도착함과 동시에 마베라군은 수도를 포기하고 후퇴했다. 다일타, 아일뢰는 베타 집단군에, 사오그란트(서부 한정)와 몬타나는 감마 집단군에게 점령당했다. 노르드란트는 후술할 해상봉쇄에 의해 고립되어 죽어갔다. 29일 오전 11시경, 트리넬 왕궁에 백십자기가 올라갔다. 그야말로 완벽한 웨스타시아의 승리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개전 3일째, 포격과 폭격이 잠잠해짐과 동시에 반 폐허가 된 트리넬 국제공항에 웨스타시아의 13개 공수여단이 투하됐다(부르군트 작전). 웨스타시아 공수군은 전차바퀴보다 큰 모든것을 싹다 죽였다. 샹페드로 4세와 왕가는 당초 수도를 지킬려 했지만, 왕궁의 코앞까지 공수부대가 진격해오자 어쩔 수 업이 칼펜시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마베라 군부의 모든 이목이 수도에 몰려있는 사이, 25일(개전 4일째) 3시경 한랜드 제6,9,7군단이 님부스시에서 마베라군 제44사단을 괴멸시켜버린 것을 시작으로 웨스타시아 육군이 마베라 남부지방을 파죽지세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쿤타치 작전의 후속으로 기획된 '바로바로싸 작전'의 요지는 일단 서부전선 중간에 위치한 369고지를 점령해 마베라 수비군을 동서로 분단, 양군의 전략적 연계를 끊은 뒤 둘로 분단된 마베라군을 베타와 감마 집단군이 해안과 산맥으로 밀어 포위섬멸하고 그러는 동안 알파 집단군은 최대한 신속한 기갑웨이브로 트리넬까지 진격해 공수군과 합류, 트리넬 시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마치 40년전의 그 나라를 보는듯한 경의로운 진격속도로 웨스타시아군은 공격 이틀만에 369고지를 점령했고, 마베라의 전력은 그들의 계획대로 동서로 갈라져 버렸다.
이제 남은것은 쌍두가 된 참새의 대가리를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동쪽의 마베라 제1,9,7군은 바르디야 전투에서 김용하 장군 휘하의 감마 집단군에게 몬타나 산맥에 포위되어 전멸해버렸고, 서부의 가다메스 수비군은 남쪽에서 몰려온 베타 집단군과 해안가를 선점한 한랜드 2군단에 의해 아게다비아 강변 방면으로 포위되어 포로 한명 없이 몰살되었다. 11사단장 시디 바라니 소장은 3시간 가량의 가잘라 대교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했지만 결국 한랜드군의 아게다비아 강 도하를 막을 순 없었다. 참새의 쌍두가 잘리면서, 이제 서부전선에 알파 집단군을 막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트리넬을 향했다.
개전 5일째, 연방방위부 국장 직권으로 화학무기 사용이 허가됐고, 그날 오후 9시경 루프트바페는 맛보기삼아 베이다에 스타인먼 화학이 갓 만든 사린, 소만, VX, 겨자가스 등의 대규모 화학무기 공습을 가했다.[8] 그곳은 마베라군의 남부주 사령부, 일명 맘무트 요새가 있던 도시였다. 이 화학탄 공습에서 도시를 수호하던 제21연대는 6시간만에 전 병력 7만명중 2,300명을 빼고 전멸했고, 몬타나주 사령부는 모두 포로가 되어 마베라 동부 야전군에 거대한 지휘 공백이 생겼다.
맘무트 요새로 총사령부를 이전한 웨스타시아 군부는 베이다의 뽕맛을 잊지 못하고 2월 26일(개전 6일째)부터 4달에 가까운 시간동안 서부전선 전역에 화학탄 폭격을 가했다. 지속된 가스폭격으로 인해 빈사상태가 된 마베라군을 한랜드 전차부대가 1차로 빠르게 쓸고 간 뒤, 독가스가 어느정도 가라앉으면 후속 보병부대가 2차로 남은 잔당들을 청소하는 전투양상이 수도에 도달할 때까지 쭈욱 반복됐다. 그것은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기동전, 일명 '전격전'이 반백년 남짓한 세월을 넘어 가장 끔찍한 형태로 부활한 것이었다.
결국 2월의 마지막날이자 개전 7일째 되던 1983년 2월 29일. 남쪽에서 달려온 알파 집단군이 트리넬에 도착함과 동시에 마베라군은 수도를 포기하고 후퇴했다. 다일타, 아일뢰는 베타 집단군에, 사오그란트(서부 한정)와 몬타나는 감마 집단군에게 점령당했다. 노르드란트는 후술할 해상봉쇄에 의해 고립되어 죽어갔다. 29일 오전 11시경, 트리넬 왕궁에 백십자기가 올라갔다. 그야말로 완벽한 웨스타시아의 승리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3.3. 교착 [편집]
7일간의 천지파괴가 끝나고, 전장에 새로운 해가 밝았다. 트리넬과 마베라 서부의 대부분은 웨스타시아 손에 떨어졌고, 왕가와 군 수뇌부들은 동부의 임시수도 칼펜으로 거처를 옮겼다. 2월 30일 오전 8시경 왕가를 태운 C-130 수송기가 세누시 국제공항에 내리고, 임시수도에서 하는 첫 어전회의가 시작됐다. 마베라는 이제 선택을 해야했다.
군부는 둘로 나뉘었다. 육군의 니콜라 드 몬테 소장을 주축으로 한 협상파, 공군의 마르사 엘 브라가 중장을 중심으로 한 항전파가 그것이었다.
먼저 협상파의 니콜라 소장은 조건부 항복을 주장했다. 83년 여름 시점에서 이 주장은 꽤 타당해보이는 주장이었다. 당시 마베라는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어보였다. 국토의 대부분은 한랜드에게 먹혀버린지 오래고 최전방의 3개 집단군은 전멸, 잔존 병력들은 뿔뿔히 흩어져 각개격파된지 오래라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 상태로 항전을 계속하다 한랜드군이 동부까지 밀고들어오면 나라고 머고 왕가의 목부터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개전 연설에서 드러났듯 웨스타시아의 목표는 완전 점령이 아닌, 몬타나 이북의 광산들과 중부의 공업지대들이었다. 때문에 협상을 통해 이것들을 때주면 나라의 명맥이라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니콜라 소장의 주장은 얼핏보면 그럴듯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이쯤에서 웨스타시아의 전쟁 계획을 다시 살펴보자.
* 우선 첫째날, 둘째날에는 공군과 포병대를 이용한 대규모 초토화 작전(쿤타치 작전)으로 마베라의 모든 군사적 인프라(특히 방공망)를 파괴함과 동시에 한랜드군의 주특기 공중전으로 제공권을 장악하고
* 셋째날엔 장악한 공중을 통해 트리넬에 공수부대를 투입(부르군트 작전), 국경선에 집중된 마베라측 병력을 수도성으로 교란시키고
* 넷째날에는 국경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바로바로싸 작전). 육군 320만을 북으로 진격 후 종심작전을 적절히 활용해 3일 안에 트리넬을 완전히 점령 후 항복문서를 받아낸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마지막의 '3일 안에 항복문서를 받아낸다' 부분이다. 브라가 중장이 꼬집은 SB계획의 유일한 허점은 이것이었다.
당시 마베라는 버블 붕괴 이후 잿더미가 된 웨스타시아에서 차량산업을 줍줍했기에[9] 전국에 자동차 공장지대가 무수히 흩어져 있었고, 이를 뒷받침할 각종 노천광산들도 남부 몬타나 산맥 부근에 다수 포진해 있었다. 차량 공업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은 곧 땅끄 물량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었다. 반면 웨스타시아는 버블 붕괴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도 않은 시점이라 전반적으로 공업력도 딸리고 인구 자체도 딸렸다. 마베라 영토의 반을 먹었지만[10]먹은 영토의 대부분은 서부 평원의 곡창 지대였고 전쟁의 목표인 아크다르 산맥 너머의 공업지대과 광산들은 여전히 마베라의 손. 반년 전부터 총동원령으로 억지로 공업력을 짜내서 80만 전차대군을 만들어냈지만 결국 장기적으로 봤을때 질적/양적으로 밀리는건 한랜드쪽이었다. 즉, 마테르전은 기본적으로 장기전으로 갈수록 마베라가 유리해지는 그림이었다. 앨빈 대통령은 이걸 알았기에 7일이라는 역사상 전무한 짧은 시일안에 최대한 빨리 수도를 점령해 왕가를 협상 테이블로 불러 목표물을 쟁취, 초단기로 전쟁을 끝내는 구상을 짰던 것이고, 만약 계획된 시한안에 전쟁을 끗내지 못한다면 모든것이 잘못되는 계획이었다.
또한 브라가 장군은 파시즘 국가의 특성을 고려하면 공업지대를 내주고 정전을 하더라도 한랜드는 결국 언젠가 다시 쳐들어올것이라 예측했는데, 이 상황에서 만일 웨스타시아와 정전 협상을 할시 적에게 꽤나 큰 영토를 때주는건 둘째치고 점령한 서부의 광대한 곡창지대에서 나온 농산물들을 수출해 경제회복 및 중공업을 재건할 시간을 제공, 향후 10,20년안에 일어날 2차 전쟁에 크나큰 고지를 내어주는 거나 다름업다는게 브라가 중장의 주장이었다.
국왕은 브라가의 손을 들어줬다.
83년 3월 1일. 마베라 외무성은 웨스타시아의 협상 제의에 ㅗ로 대응했다. 앞서 말한대로 최대한 빠른 종전을 원한 웨스타시아는 약간 당황했다. 한편 웨스타시아군 점령지에서는 잔존 마베라군들을 토벌하기 위한 산발적인 교전을 계속하느라 진격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83년 3월부터 마베라군은 동자오그란트, 수미나이, 노르트란트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광할한 길이의 참호선을 건설했다. 마침 3월 3일부터는 2월에 끝났던 장마가 다시 찾아와 전선 전역이 진흙으로 뒤덮혔다. 3주간 이어진 장마로 땅이 질척거려 땅끄들이 진격을 못하니 한랜드군의 전격전 전술이 돈좌, 공세가 막을 내리고 전선이 고착화되었다. 당황한 한랜드군은 전쟁 전에 연구해뒀던 인공강우 프로젝트 '나푸사 작전'을 실행, 600만톤이 넘는 HINA 분무액[11]을 전선에 뿌려 공기중 수증기를 한방에 응결, 3~4일만에 장마를 끝내려 했지만 계산 실수와 마베라 정보부 & 루이나 MIA의 분무액 생산라인 사보타쥬[12]가 겹쳐 뿌려진 불량용액이 역효과를 유발. 예보대로면 3월 중순에 그칠 예정이던 장마가 7월까지 연장되버리는 참사가 발생했다. 굳은 날씨때문에 그렇게 한달내내 내린 장마로 양측의 기갑 전력들이 대부분 봉쇄되어버리면서 남은건 보병부대 뿐이었다.
그렇게 솔로몬, 미스라타, 아크로마 전투에서 1차대전 이후 봉인되어있었던 참호전이 반백년의 세월을 넘어 부활하고야 말았다. 웨스타시아군은 여전히 미미하게 공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3달이 넘는 기간동안 전선에 변화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하루에 수킬로미터 진격에 그쳤으며 가끔은 몇미터씩 진격했던 때도 있었다. 이런 질척이는 전황은 솔로몬 공방전에서 정점을 찍었는데, 도시 하나 먹는것에 양군 총합 3만명[13]의 희생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이렇듯 양측의 손해가 극심했기에, 브라가 장군은 쏟아지는 반전 여론에 한동안 경질당할뻔 했다.
군부는 둘로 나뉘었다. 육군의 니콜라 드 몬테 소장을 주축으로 한 협상파, 공군의 마르사 엘 브라가 중장을 중심으로 한 항전파가 그것이었다.
먼저 협상파의 니콜라 소장은 조건부 항복을 주장했다. 83년 여름 시점에서 이 주장은 꽤 타당해보이는 주장이었다. 당시 마베라는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어보였다. 국토의 대부분은 한랜드에게 먹혀버린지 오래고 최전방의 3개 집단군은 전멸, 잔존 병력들은 뿔뿔히 흩어져 각개격파된지 오래라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 상태로 항전을 계속하다 한랜드군이 동부까지 밀고들어오면 나라고 머고 왕가의 목부터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개전 연설에서 드러났듯 웨스타시아의 목표는 완전 점령이 아닌, 몬타나 이북의 광산들과 중부의 공업지대들이었다. 때문에 협상을 통해 이것들을 때주면 나라의 명맥이라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니콜라 소장의 주장은 얼핏보면 그럴듯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이쯤에서 웨스타시아의 전쟁 계획을 다시 살펴보자.
* 우선 첫째날, 둘째날에는 공군과 포병대를 이용한 대규모 초토화 작전(쿤타치 작전)으로 마베라의 모든 군사적 인프라(특히 방공망)를 파괴함과 동시에 한랜드군의 주특기 공중전으로 제공권을 장악하고
* 셋째날엔 장악한 공중을 통해 트리넬에 공수부대를 투입(부르군트 작전), 국경선에 집중된 마베라측 병력을 수도성으로 교란시키고
* 넷째날에는 국경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바로바로싸 작전). 육군 320만을 북으로 진격 후 종심작전을 적절히 활용해 3일 안에 트리넬을 완전히 점령 후 항복문서를 받아낸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마지막의 '3일 안에 항복문서를 받아낸다' 부분이다. 브라가 중장이 꼬집은 SB계획의 유일한 허점은 이것이었다.
당시 마베라는 버블 붕괴 이후 잿더미가 된 웨스타시아에서 차량산업을 줍줍했기에[9] 전국에 자동차 공장지대가 무수히 흩어져 있었고, 이를 뒷받침할 각종 노천광산들도 남부 몬타나 산맥 부근에 다수 포진해 있었다. 차량 공업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은 곧 땅끄 물량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었다. 반면 웨스타시아는 버블 붕괴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도 않은 시점이라 전반적으로 공업력도 딸리고 인구 자체도 딸렸다. 마베라 영토의 반을 먹었지만[10]먹은 영토의 대부분은 서부 평원의 곡창 지대였고 전쟁의 목표인 아크다르 산맥 너머의 공업지대과 광산들은 여전히 마베라의 손. 반년 전부터 총동원령으로 억지로 공업력을 짜내서 80만 전차대군을 만들어냈지만 결국 장기적으로 봤을때 질적/양적으로 밀리는건 한랜드쪽이었다. 즉, 마테르전은 기본적으로 장기전으로 갈수록 마베라가 유리해지는 그림이었다. 앨빈 대통령은 이걸 알았기에 7일이라는 역사상 전무한 짧은 시일안에 최대한 빨리 수도를 점령해 왕가를 협상 테이블로 불러 목표물을 쟁취, 초단기로 전쟁을 끝내는 구상을 짰던 것이고, 만약 계획된 시한안에 전쟁을 끗내지 못한다면 모든것이 잘못되는 계획이었다.
또한 브라가 장군은 파시즘 국가의 특성을 고려하면 공업지대를 내주고 정전을 하더라도 한랜드는 결국 언젠가 다시 쳐들어올것이라 예측했는데, 이 상황에서 만일 웨스타시아와 정전 협상을 할시 적에게 꽤나 큰 영토를 때주는건 둘째치고 점령한 서부의 광대한 곡창지대에서 나온 농산물들을 수출해 경제회복 및 중공업을 재건할 시간을 제공, 향후 10,20년안에 일어날 2차 전쟁에 크나큰 고지를 내어주는 거나 다름업다는게 브라가 중장의 주장이었다.
국왕은 브라가의 손을 들어줬다.
83년 3월 1일. 마베라 외무성은 웨스타시아의 협상 제의에 ㅗ로 대응했다. 앞서 말한대로 최대한 빠른 종전을 원한 웨스타시아는 약간 당황했다. 한편 웨스타시아군 점령지에서는 잔존 마베라군들을 토벌하기 위한 산발적인 교전을 계속하느라 진격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83년 3월부터 마베라군은 동자오그란트, 수미나이, 노르트란트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광할한 길이의 참호선을 건설했다. 마침 3월 3일부터는 2월에 끝났던 장마가 다시 찾아와 전선 전역이 진흙으로 뒤덮혔다. 3주간 이어진 장마로 땅이 질척거려 땅끄들이 진격을 못하니 한랜드군의 전격전 전술이 돈좌, 공세가 막을 내리고 전선이 고착화되었다. 당황한 한랜드군은 전쟁 전에 연구해뒀던 인공강우 프로젝트 '나푸사 작전'을 실행, 600만톤이 넘는 HINA 분무액[11]을 전선에 뿌려 공기중 수증기를 한방에 응결, 3~4일만에 장마를 끝내려 했지만 계산 실수와 마베라 정보부 & 루이나 MIA의 분무액 생산라인 사보타쥬[12]가 겹쳐 뿌려진 불량용액이 역효과를 유발. 예보대로면 3월 중순에 그칠 예정이던 장마가 7월까지 연장되버리는 참사가 발생했다. 굳은 날씨때문에 그렇게 한달내내 내린 장마로 양측의 기갑 전력들이 대부분 봉쇄되어버리면서 남은건 보병부대 뿐이었다.
그렇게 솔로몬, 미스라타, 아크로마 전투에서 1차대전 이후 봉인되어있었던 참호전이 반백년의 세월을 넘어 부활하고야 말았다. 웨스타시아군은 여전히 미미하게 공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3달이 넘는 기간동안 전선에 변화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하루에 수킬로미터 진격에 그쳤으며 가끔은 몇미터씩 진격했던 때도 있었다. 이런 질척이는 전황은 솔로몬 공방전에서 정점을 찍었는데, 도시 하나 먹는것에 양군 총합 3만명[13]의 희생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이렇듯 양측의 손해가 극심했기에, 브라가 장군은 쏟아지는 반전 여론에 한동안 경질당할뻔 했다.
3.4. "수면위의 모든것은 웨스타시아의 적" [편집]
이제 난감한 쪽은 웨스타시아였다. 당초의 7일 전쟁 계획은 물건너간 상황에서, 병사와 물자들은 계속 갈려나가고 있는데 장마로 더이상의 진격도 불가했다. 현 시점에서 가능한 수는 그저 7월에 장마가 끝날 때까지 버티다 땅이 건조해졌을때 다시 진격하는 것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마베라 측은 곡창지대를 잃었음에도 NLTO에서 들어오는 원조가 워낙 막대했기에 오랫동안 버틸수 있었지만, 웨스타시아 측은 기껏얻은 곡창지대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지출을 해야했다는 것이었다.
한편 지상에서 육군과 공군이 고생하는 동안 해군쪽은 내심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전쟁 초반 한랜드 육군과 공군이 트리넬을 향해 쫙쫙 밀고가면서 전승훈장 여럿따고 있을때[14] 해군쪽은...
이미 전쟁 전부터 한직 취급이었던 수상함대는 전쟁 초반에 갈려나가 비중이 공기가 된지 오래고, 그나마 물량이 많았던 잠수함대쪽은 2달동안 왕립해군을 겨우겨우 궤멸시켰더니 대중들은 육지 전황에만 관심있고, 바다에선 아직도 미사일고속정 짤짤이들과 육지에서 탈출한 마베라 수송함대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와 정신은 하나도 없는 와중에 예산은 여전히 쥐꼬리만한 괴악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애초에 해군 입장에서는 육군 및 공군 주도로 개전한 이 전쟁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존심 크리티컬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전쟁의 주인공이 되길 원했다.
알렉산더 S. 퍼킨 잠수함대 제독은 이 두 문제의 답을 알고있었다. 83년 4월 13일, 퍼킨 제독은 상부에 '브루스파팅턴 계획'의 보고서를 제출한다. 요지는 현재 가용가능한 모든 잠수함 전력을 총동원해서 마베라 연안을 지나는 모든 선박[15]을 보이는대로 격침. 마베라 밥줄인 서방 원조를 아예 끊어버려 완전히 고사시켜 버리는 것과 그것을 대규모 해군증강을 포함한 계획이었다. 누가 봐도 원조집이 어디인지는 뻔히 보였다.
반대파는 물론 어마어마했다. 이 전략의 원조집은 이걸 과하게 쓰다가 잠자던 호랑이를 건드려 패망했던 역사가 있으니 자명한 결과였다. 특히 해군이 이 전쟁에서 계속 쩌리로 남길 바랬던 육군은 외교적 리스크를 이유로 들며 끝까지 결사반대를 외쳤지만, 결국 총사령부 입장에선 이외엔 마땅한 방법도 없었기에 작전 시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계획의 가장 큰 난점은 마베라해의 해저도시 노스리지 자유시를 차지하고 있던 신동경이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곳은 NEDP 인사들과 몇몇 강대국들의 첩보기관들을 제외하면 육상 세계에 거의 알려진게 없는 미지의 땅이었는데, 당시 웨스타시아 군부에서 알고있는 거라곤 NEDP의 소굴이라는 점과 웨스타시아와 같은 민족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당시 고고학자들이 유고랜드에 남아있던 유적들을 조사해서 알아냈던 것은, 과거 웨스타시아인과 오스탈로스인은 한민족이었다가 약 2800년전에 전쟁으로 갈라져나온 사이였다는 사실이었는데, 문제는 웨스타시아 측에선 이걸 신동경측이 아는지 모르는지 알길이 없었다. 만약 신동경측이 이걸 알고있다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실상 실패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웨스타시아군은 실상 도박에 가까운 수를 던진 셈이었다.
한편 지상에서 육군과 공군이 고생하는 동안 해군쪽은 내심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전쟁 초반 한랜드 육군과 공군이 트리넬을 향해 쫙쫙 밀고가면서 전승훈장 여럿따고 있을때[14] 해군쪽은...
이미 전쟁 전부터 한직 취급이었던 수상함대는 전쟁 초반에 갈려나가 비중이 공기가 된지 오래고, 그나마 물량이 많았던 잠수함대쪽은 2달동안 왕립해군을 겨우겨우 궤멸시켰더니 대중들은 육지 전황에만 관심있고, 바다에선 아직도 미사일고속정 짤짤이들과 육지에서 탈출한 마베라 수송함대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와 정신은 하나도 없는 와중에 예산은 여전히 쥐꼬리만한 괴악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애초에 해군 입장에서는 육군 및 공군 주도로 개전한 이 전쟁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존심 크리티컬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전쟁의 주인공이 되길 원했다.
알렉산더 S. 퍼킨 잠수함대 제독은 이 두 문제의 답을 알고있었다. 83년 4월 13일, 퍼킨 제독은 상부에 '브루스파팅턴 계획'의 보고서를 제출한다. 요지는 현재 가용가능한 모든 잠수함 전력을 총동원해서 마베라 연안을 지나는 모든 선박[15]을 보이는대로 격침. 마베라 밥줄인 서방 원조를 아예 끊어버려 완전히 고사시켜 버리는 것과 그것을 대규모 해군증강을 포함한 계획이었다. 누가 봐도 원조집이 어디인지는 뻔히 보였다.
반대파는 물론 어마어마했다. 이 전략의 원조집은 이걸 과하게 쓰다가 잠자던 호랑이를 건드려 패망했던 역사가 있으니 자명한 결과였다. 특히 해군이 이 전쟁에서 계속 쩌리로 남길 바랬던 육군은 외교적 리스크를 이유로 들며 끝까지 결사반대를 외쳤지만, 결국 총사령부 입장에선 이외엔 마땅한 방법도 없었기에 작전 시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계획의 가장 큰 난점은 마베라해의 해저도시 노스리지 자유시를 차지하고 있던 신동경이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곳은 NEDP 인사들과 몇몇 강대국들의 첩보기관들을 제외하면 육상 세계에 거의 알려진게 없는 미지의 땅이었는데, 당시 웨스타시아 군부에서 알고있는 거라곤 NEDP의 소굴이라는 점과 웨스타시아와 같은 민족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당시 고고학자들이 유고랜드에 남아있던 유적들을 조사해서 알아냈던 것은, 과거 웨스타시아인과 오스탈로스인은 한민족이었다가 약 2800년전에 전쟁으로 갈라져나온 사이였다는 사실이었는데, 문제는 웨스타시아 측에선 이걸 신동경측이 아는지 모르는지 알길이 없었다. 만약 신동경측이 이걸 알고있다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실상 실패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웨스타시아군은 실상 도박에 가까운 수를 던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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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뢰에 맞아 폭발하는 카푸초함 |
RMN 카푸초(Capuccio)함은 마베라 해군(Maberra Royal Navy, RMN) 소속의 순양함으로, 4월 24일 마베라 국영방송에서 진행되던 선전 생방송 도중 웨스타시아 해군 소속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격침되었다. 해당 방송은 마베라 전역에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어뢰 피격과 함정 침몰 장면이 실시간으로 송출되면서 국민적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마베라 국내에서는 전쟁 지속에 대한 회의론과 항복 요구 여론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해당 생방송이 송출된 이후로 마베라 해군의 활동이 급격히 감소하였다[16],
3.4.1. 루이나의 1차 경고 [편집]
루이나 공화국 외교부는 웨스타시아 해군이 실시 중인 소위 "브루스파팅턴 작전(Operation Bruce Pottington)"[17]이라 불리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강력히 규탄한다.본 작전은 민간 해역과 군사적 긴장 완화 구역을 불문하고 모든 선박을 적대적으로 간주하고 격침 대상으로 삼는 비인도적 전략으로, 국제 해양법과 무력 충돌 규범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행위이다. 특히 4월 24일, 마베라 해군 소속 카푸초(Capuccio)함이 선전방송 생중계 중 어뢰 공격으로 침몰한 사건은 해당 작전의 비겁함과 도발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루이나는 웨스타시아 측에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브루스파팅턴 작전의 즉각적이고 조건 없는 중단을 요구한다.2. 해양에서의 민간 및 중립국 선박에 대한 공격은 국제사회의 공동 대응을 초래할 수 있음을 명백히 경고한다.3. 루이나는 자국 및 동맹국의 항행의 자유를 수호할 권리와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필요 시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루이나 정부는 평화와 국제질서를 중시하며, 어떠한 형태의 해상 도발에도 단호히 대응할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루이나 외교부의 웨스터시아에 대한 1차 규탄
3.5. 개무시 [편집]
허지만 웨스타시아 측은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루이나 외교부의 경고에도 ㅗ로 일관했고, 의외로 루이나 해군이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음에 따라[18] 웨스타시아 해군은 의외로 순조롭게 마베라 근해의 재해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5월 초부터 마베라해는 완전한 죽은 자들의 땅이 되었다.
봉쇄의 효과는 굉장했다! 서방의 원조만으로 실상 버티고 있던 마베라는 봉쇄시작 몇주만에 빠르게 무너져내렸다. 당시 마베라가 버티고있던 동부주들은 대부분이 더운 사바나 기후 + 장마로 햇빛이 안듬 크리로 도저히 농사를 지을땅이 안되었던데다, 대부분의 비축미들은 서부에 있었던 탓에 마베라는 빠르게 아사해가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굶어죽은 시체들과 거지들이 넘쳐났고, 끊임없이 오는 공습은 하나의 거대한 절망덩어리를 형성했다. 그렇게 7월이 되자 서서히 장마도 그치고, 웨스타시아군은 다시 진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망국 직전의 순간이었다.
봉쇄의 효과는 굉장했다! 서방의 원조만으로 실상 버티고 있던 마베라는 봉쇄시작 몇주만에 빠르게 무너져내렸다. 당시 마베라가 버티고있던 동부주들은 대부분이 더운 사바나 기후 + 장마로 햇빛이 안듬 크리로 도저히 농사를 지을땅이 안되었던데다, 대부분의 비축미들은 서부에 있었던 탓에 마베라는 빠르게 아사해가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굶어죽은 시체들과 거지들이 넘쳐났고, 끊임없이 오는 공습은 하나의 거대한 절망덩어리를 형성했다. 그렇게 7월이 되자 서서히 장마도 그치고, 웨스타시아군은 다시 진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망국 직전의 순간이었다.
3.6. 왕가의 분전 [편집]
마베라는 상 페드로 왕가(House of San-Pedro)가 통치하는 왕정 국가로, 전면전 발발 이후 왕실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직접 전장에 참여하는 이례적 결단을 내렸다. 국왕 상 페드로 3세(San-Pedro III)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자신의 직계 자녀들에게 실질적인 군 지휘권을 부여하며, 왕실이 국민과 함께 싸울 것임을 공식 선언했다.
“마베라의 아들딸들이여.
나, 상 페드로 3세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왕으로서가 아니라, 이 땅에 생명을 바친 모든 가문의 아버지로서 말하노라.
우리가 맞선 전쟁은 단지 국경의 다툼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언어를, 우리의 신을, 우리의 기억을 지우려는 자들에 맞서는 싸움이다.그러므로 왕관은 더 이상 성벽 뒤에 머무를 수 없다.
나의 자식들—라파엘, 카심, 파리드, 그리고 나디아—이 네 사람은 오늘부로 군의 부름을 받아, 각자의 자리에서 병사들과 함께 땀과 피를 흘릴 것이다.
나는 아버지다. 그들을 보내는 내 마음이 무겁지 않다면 거짓이리라. 그러나 나는 또한 왕이다. 피는 높이 흐르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흘러야 그 가치를 가진다.왕의 자식은, 가장 먼저 총을 들어야 한다. 왕의 집은 가장 늦게 불타야 한다.그대들도 나와 함께 싸워다오.
이 전쟁은 모든 가문의 전쟁이니, 모든 피의 헌신이 존귀할 것이다.신께 맹세하노니, 마베라는 무너지지 않노라. 왕관은 피로 지켜질 것이다.”
왕자 라파엘 페드로(Rafael Pedro), 카심 페드로(Qassim Pedro), 파리드 페드로(Farid Pedro), 그리고 공주 나디아 페드로(Nadia Pedro)는 각각 해군, 육군, 병참, 공군 부문에 배속되어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이들의 활약은 ‘왕가의 분전(Royal Family in the War Effort)’이라는 표현으로 불리며 대중적 상징이 되었다.
특히 왕족이 직접 총을 들고 전선에 나선 사실은, 전황이 불리한 가운데서도 마베라 국민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 곳곳에서 자원입대가 증가하고, 국왕에 대한 충성 서약과 시민들의 자발적 구호활동이 이어졌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신이시여 우리 왕을 도우소서”라는 구호가 민병 조직의 표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황이 악화되면서 라파엘 페드로와 카심 페드로는 각각 북부 해역과 서부 전선에서 전사하였다. 이들의 죽음에 마베라 국민들은 분노하였고 떨어져가던 사기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마베라의 백성들이여.나는 지금, 아버지의 심장으로 이 말을 전하노라.
나의 장자, 라파엘 페드로는 북부 해역의 칠흑 같은 밤 속에서, 함대를 지휘하던 중 적의 어뢰를 맞고 바다에 잠겼다.
나의 차남, 카심 페드로는 제23 기갑여단과 함께 중부 전선의 사막에서 포화를 뚫고 전진하던 중, 장렬히 산화하였다.이들은 왕위 계승자였고, 피를 이은 내 살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은 마베라의 병사였다.나의 자식이 죽었다는 사실은 한 가정의 비극이 아니다. 이는 왕실의 의무가 말이 아닌 피로써 증명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라 믿는다.나는 결코 통곡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눈물이 적에게 위로가 될 수는 없기에.
그러나 나는 기억할 것이다. 두 왕자의 이름은, 앞으로 마베라의 역사 위에 불멸로 남을 것이다.모든 깃발은 조기를 달라.
모든 종은 108번을 울려라.
모든 자는 이 전사를 명예로 기억하라.
백성들이여,
왕실은 피를 흘렸다. 이제 그 피는 마베라의 흙 속에 섞여, 이 땅의 일부가 되었다.
신께 맹세하노니, 이 전쟁은 우리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계속될 것이다.
왕관은 아직 전선 위에 있다.”
3.7. 주변국들의 참전 [편집]
한편, 체르드는
3.8. 딮스마르크 추격전: 봉쇄가 뚫리다 [편집]
자세한건 딮스마르크 추격전문서를 참고.
3.8.1. 벵가지 상륙 [편집]
자세한건 벵가지 상륙전문서를 참고.
3.8.2. 대공세 [편집]
3.8.3. 번외: 라이넬 항 탈출 [편집]
자세한건 라이넬 항 탈출문서를 참고.
3.9. 발악: 은색작전 [편집]
3.9.1. 칼펜슈타인 공중전, 루프트바페의 괴멸 [편집]
3.9.2. 토브룩의 참화 [편집]
3.10. 로벤자운 작전 유출과 일시휴전 [편집]
3.11. 웨스터발트까지 10km [편집]
3.12. 종막 [편집]
4. 반전: 헤이그에서 밝혀진 것 [편집]
5. 그의 행방은 어디로? [편집]
6. 이후 [편집]
7. 기타 [편집]
[1] 이러한 방식으로 영공 근처를 지나가거나 살짝 침범하는 도발은 현재도 미제국, 중국, 소련이 서로 자주 행하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도발하면 정찰기에 집중되는 레이더 전파의 주파수와 패턴을 수집(ELINT)할 수 있고 상대국 방공망의 대응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제국이 중국 방공망 근처에서 알짱거리거나 중국, 소련이 한국 방공식별구역을 통보없이 들락날락거리는 것도 이런 일환이다.[2] B747에 장착된 4개의 유압 시스템 중 승강타를 조작할 때 쓰이는 3번 유압은 비상 강하를 하던 367편이 다시 상승하지 못한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파괴되었다고 볼 수 있다.[3] 피격 직후 급격한 기내 감압으로 인해 저고도로 하강하겠다는 교신을 도쿄 컨트롤에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 무전은 잡음이 심해 동사랜드 컨트롤에서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관제사는 주파수를 확인한 뒤 다시 교신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367편과의 교신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4] 이때 엔진은 정상이라고 하는 녹음이 들린다.[5] 미사일 폭발의 여파로 추락 과정에서 공중분해됐을 가능성도 있다.[6] 어선이라고는 하지만 아마도 밀수품을 나르는 선박이었을 것이다.[7] 꽤나 중요한 문제였다. 랜드해협의 해상무역은 유럽쪽으론 북쪽의 포틸락스 해협과 북마베라해로 나가고, 아시아 및 인도양 쪽으론 동남쪽의 카이삼 해로 나가는데, 이중 북마베라 해가 나라 하나에 통째로 먹힌다는건 유럽쪽 해상무역의 통제가 가능해짐과 동시에, 아래쪽 남포틸락스 해협을 먹고있는 루이나의 패권이 약화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8] 이딴 짓이 가능했던 이유는, 웨스타시아 민족도 엄연한 아틀란티스 민족의 후손이라 태생적으로 화생방에 강한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베라에도 웨스타시아인들이 적지 않은수가 존재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추방당한지 오래였다. [9] 전자산업은 일본이 가져갔다.[10] 반을 먹었다는 서술 자체도 웨스타시아의 입장에서 서술해준 것이다, 실제로 점령지의 유지와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실제로 점령한 영토는 극히 일부라 봐야한다.[11] 웨스타시아 연방 기술개발부 소속 R.J. 라인하르트 박사가 개발해낸 물건으로, 본디 수증기 결집용 원소로 아이오딘화은을 뿌려야 했기에 비용이 천문학적이던 인공강우 기술을 기존의 7분의 1 비용으로 쓸수있게 해준 용액이다. [12] HINA 분무액의 생산은 스타인먼 화학이 담당했는데, 본토의 공장들은 독가스 만드느라 이미 바빠서 주로 점령지의 로동력을 이용해 분무액을 생산했던게 화근이었다. [13] 민간인 피해를 제외하고 3만명이다.[14] 물론 이건 해군 입장에서 그렇게 보였다는 거지, 상술했듯 육지쪽은 실제론 처음 한달 이후론 지옥같은 참호전에 빠진지 오래였다. 전승훈장을 많이딴다는건 그만큼 병사가 많이 갈려나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15] 민간선박이든 타국선박이든 상관없었다. [16] 당시 마베라 해군의 두려움은 상당했는데, 당시 음탐부사관이 과도한 스트레스로인한 정신병으로 의가사 전역할 정도였고, 근해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소리가.들리며누함대 전체가 꽁지가빠져라 도망쳤다, 후에는 이런 사실을 인지한 웨스타시아 해군이 해당 소음을 직접 녹음해서 소형 수중드론에 매달아서 마베라 해군을 겁주고 다녔다.[17] 당시에는 작전명이 공개되지 않았었는데 루이나가 경고의 의미에서 작전명을 공개한것으로 보인다.[18] 사실 이럴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루이나 해군 상부는 웨스타시아의 잠수함 전력을 과대평가 하고 있었다. 마베라 해군의 카푸초함은 루이나의 플라자 그룹에서 최신 대잠전 사양으로 업그레이드를 한 함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수출용 프로그램은 다운그레이드 버전인데다가 마베라 해군의 군 기강의 헤이함과 오랜 평화로 인한 장비 점검 불량으로 장비의 성능에 불문하고 격침당할 운명인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같은 일을 루이나 해군 상부에서 속속들이 알고있기란 불가능했고, 웨스타시아 잠수함에 대한 제한적 대잠 작전만을 승인했었으나 이마저도 곧 종료하게된다






